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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 지정 : 보물
  • 한자명 : 浦項 寶鏡寺 圓眞國師碑
  • 유형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시대 : 고려
  • 지정일 : 1963-01-21
  • 소재지 :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이수(이首)가 없는 비로서 신석(身石) 양각(兩角)을 접은 별개의 형식을 갖춘 일례이다. 제액(題額)은 「圓眞國師碑銘」, 자경(字徑) 7.6cm, 전체횡서(篆體橫書)이다. 비제(碑題)는 「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謚圓眞國師碑銘幷序」로 시작되며 서자(書者)에 관해서는 「이(李)」자 이하가 지금 판독불능이나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有高麗李松老所撰圓眞碑」라 있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도 「···寶鏡寺圓眞國師 碑 金孝印書 李松老文···」이라 하여 서자는 이송노(李松老)인 것으로 추정된다. 원진은 고려중기의 승으로 속성 신씨(申氏), 휘 승형(承逈), 자 영회(永廻), 부 경성(鏡城), 비문은 「神童十三投曦陽山鳳巖寺洞純師剃落其髮」, 13세에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의 동순사(洞純師)에게서 체발(剃髮), 다음해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하였다. 명종(明宗) 27년 정사춘(丁巳春)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서 왕은 사의 도행(道行)이 초선(抄選)에 이름을 듣고 유가(有可)에 명하여 특히 초록(抄錄)을 가하였다. 후에 명산을 유력하고 희종(熙宗) 4년(1208)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주석하였다. 「康廟郞政之三年批授三重大師···」, 강종(康宗) 3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를 가(加)하였고 조(詔)하여 보경사(寶鏡寺)에 주하였다. 고종(高宗) 2년 선사(禪師)를 가하였고 동 7년(1220)에 의종(毅宗)을 대사에게 신속(新屬)하여 체발케하였다. 고종(高宗) 8년 7월 공산(公山) 염불사(念佛寺)에 이거(移居), 9월 2일에 천화(遷化)하였음을 비문은 기록하고 있다. 보령(寶齡) 51, 법랍(法臘) 24, 왕은 문계진도(聞計震悼)하여 국사(國師)를 추증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내렸다. 동 10월 10일 문도 오십여인은 공산남록에서 다비(茶毗), 다음날 영골(靈骨)을 수습하여 신□산(神□山)에 이장하였다. 말미는 「甲申五月日沙門慧寂等立石」으로 끝나는 바 갑신은 고종 11년(1224)이다. 서자(書者) 김효인(金孝印)은 안동인(安東人), 관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였으며 려사에는 「性嚴毅, 少志學, 善書」이라 했고 서청()은 그의 서에 관하여 「字體?徵大肉 而骨力圓勁 淸婉可愛」라 평하였다. 비문은 자경 2.1cm의 해서(楷書)이다. 귀부(龜趺)와 대석(臺石)은 단일석이며 폭이 배면과 거의 같은 정도의 넓이로 주위에 단엽(單葉) 44연판을 각출(刻出)한 비좌(碑坐)가 있다. 함주귀두(含珠龜頭)는 용형화(龍形化)하였고 양각(兩角)을 귀접이한 신석 둘레에는 넓이 7.4cm의 당초문대(唐草文帶)를 조식(彫飾)하였다. 신석둘레의 조식은 려대 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바이며, 이수가 없는 귀접이 형식도 비교적 하대에 속하는 보광사중창비(普光寺重創碑)(공민왕(恭愍王) 7년, 1358)와 조선초기에 속하는 보광사대지국사비(普光寺大智國師碑) 등에서 볼수 있는 형식이다.

학술자료

  • 1. 금석문 탁본조사보고서 경상북도 Ⅰ(2014년 발행)
    조사보고서 / 저자 : 문화재청,불교중앙박물관 / 발행처 : 문화재청
  • 2.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 정밀실측조사보고서 : 보물 제252호(2018년 발행)
    단행본 / 저자 : 포항시 / 발행처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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