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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김유신

자(호)
 
인물유형
장군
시대배경
삼국시대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는 편입되어 있었지만, 왕족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 패배하여 전의를 잃고 있었다. 이 전투에 그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김춘추가 종전에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로 청병하러 가기에 앞서, 교섭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는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해 9월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의 요충인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성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못 만난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663년에는 백제부흥을 꾀한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한 왜(倭)의 연합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어 평정하였다.

661년(문무왕1) 6월에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진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려고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하고,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왕까지 원정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647년(진덕여왕1)과 648년의 전투는 압량주군주로 그 일대 전투를 지휘한 형태였으나, 649년의 전투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해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도 나타난다. 그해 10월에 태종무열왕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그는 삼국통일 전쟁과정의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해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반란세력의 우두머리는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고 있던 유성(流星)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도 전통적 신라의 귀족이었다.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도 컸음은 분명하다.

660년에는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함을 빌미로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꺾은 바 있다.

연속되는 출정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다든가,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앞을 어깨를 드러내고 앞장선다거나,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의 사기를 북돋우려 노력한 것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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