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북도 SNS 바로가기

  • 페이스북
  • 블로그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유튜브

신돌석

신돌석

자(호)
순경
인물유형
장군
시대배경
조선시대

신돌석의 관명은 태호이고 돌석은 어릴 때 이름이다. 자는 순경이며 1878년 11월 3일 외가인 축산면 도곡 2동(복대미)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산 신시로 고려의 뛰어난 가문이 이조 시대에 들어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배척을 받아 드디어 장군의 7대조 때 동해안에 접한 영해 방면으로 낙향한 후 대대로 벼슬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자라나면서 그의 힘을 당할 사람이 없었고 수 십장 되는 구릉을 수월하게 뛰어 넘으니 실로 하루에 5백리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고장 사람들은 장사가 났다고 했다. 15세가 되자 그는 사방으로 뜻있는 사람과 사귀니 모두 큰 인물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앞산(고래산)에 올라가서 바위굴에 앉아 남몰래 밤마다 병서를 공부하는데 그의 어른이 수상하다 싶어 뒤를 밟아가서 산에 올라가보니 이리뛰고 저리뛰고 바위를 들었다 놓고 하면서 무술공부를 닦고 있는 지라 집안에 장수가 나면 일족이 멸종하게 된다고 생각해서 병서를 신돌석 모르게 없애 버렸다.

이 뒤 신돌석은 희망을 잃었다가 다시 힘을 내어 각처를 돌아 다녔지만 더 이상 무술공부를 하지 못했다.

1895년 8월에 경복궁에서 명성왕후가 일본놈의 손에 의하여 살해되고 나니 이듬해 전국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병신년(1896년) 의병운동에 신돌석은 영해의병의 중군장이 되었다.

곧 의병 해산이란 나라의 명령에 따라 모두 헤어지고 장군은 각지를 돌아 다니면서 손병희, 박상진, 이강년 같은 분과 우정을 맺고 특히 박상진과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 1905년 11월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대곡

>이라는 논설이 게재되니 이듬해 다시 각처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돌석 장군은 1906년 3월 15일 자기 집에서 뜻을 같이 하는 벗 수백명을 모아 잃어가는 주권을 다시 찾기 위하여 사울 것을 맹세하고 군에 쓸 많은 물자와 양식을 모두 자기 힘으로 준비하고 대장에 추대되었다.이를 본 일본 헌병과 군인은 도저히 당하기 어려워 중앙에 있는 군대를 움직였다. 그래서 신돌석 장군은 강원 평해로 싸울 자리를 옮기면서 평해 골을 기습하여 그곳의 적 1000여명이 영해 방면으로 도주해 가자 뒤돌아서 영해성을 포위하고 10배나 넘는 적을 무찌르고 도 다시 강원도로 들어 갔다가 그해 10월 제2차 영해를 쳐들어 가니 적군은 미리 도망가고 말았다가 다시 싸울 준비와 병력을 가다듬어 육지와 바다로부터 물밀 듯이 영해로 공격해 왔다. 그래서 그는 적병과 용김히 싸웠으나 워낙 무기와 병력의 수가 모자라 싸움에 패하고 하는 수 없이 영양 일월산 평해 백암산 등 험한 산악지대에 물러가서 의병의 본거지로 삼았다. 적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2년간이나 싸웠다.

1907년에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비밀사신이 가고 8월에 우리 군대가 해산되어 민근호등 1000여명이 강원도 원주에서 이강년 본대 약 600여명이 9월에 문경에서 다시 조인환등이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어났다. 또 춘천 쌍호 적성에서 이인용, 이완체, 지용기 등 각기 200명씩 600여명이 나타났다.

10월에 김동식, 이석응 등이 약 300명으로 순창, 임실 등지에서 일본 수비병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고 11월부터 12월에는 이인영, 방관일, 정대일 등이 700명, 차도선 이하 400명, 김수인 이하 500명 등 고모곡 상수 서흥 등지에서 각각 출몰하여 싸웠다. 그 중에 진위대가 적과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 피하면서 일월산에 있는 신돌석 장군 지휘하에 많이 모여 들었다.

적은 겹겹이 둘러싸고 외부와의 교통을 끊고 말았다. 교통이 끊기어지고보니 엄동설한이 닥쳐와서 의병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하고 다른 물자와 무기가 모자라는 데다 왜병들의 압력이 갈수록 심하여 도저히 지탱하기 어려워 부득이 동지들이 모인 의진을 해산시키고 다시 만날 날짜를 약속하고 1908년 11월에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손잡고 맹세하며 헤어졌다.

장군은 가족을 깊은 산골에 두고 혼자 평민 차림을 하고서 동지를 구하여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다가 지품면 눌곡동에서 동지이던 부하 고종사촌 형제간인 김상연을 만나 그의 권고로 그 집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들은 반갑다고 술로서 묵은 정을 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군은 계획적으로 권하는 술인줄 모르고 사양치 않고 마시다가 취해서 잠이 들었다.

이 때 김씨 형제가 잠자는 장군을 적의 현상금에 욕심이 나서 도끼와 떡매로 내리찍어 순국하게 한 것이다.

그때가 바로 1908년 11월 16일이였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행복콜센터 :
 15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