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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통계웹진
2015년8월17일
결과분석
해방1년전대비350만의인구증가와성비역전에대해어떻게해
석하여야할까?여기에대해1946년현주인구보고서는다음과같이
분석하고있다.
먼저출생아수에서사망자수를뺀자연증가인구가70만명이상으
로해방전까지조선인의출생률이1.7%(연간27만명)였음을고려할
때마치전후출산률이이상적으로높아지는것처럼해방이후높은
출생증가가있었다.
두번째,해방이후부터귀국자수파악을위한장비가설치된1945
년10월15일까지귀국자가35만명정도로추산되고,이후1946년10
월2일까지외무국에등록된해외에서귀국하였거나북한으로부터
월남한사람의수가188만명으로집계되기에총220만명정도가해
방후1년사이에귀국을한것으로추정된다.
세번째,일제가패망후소각에의해조선인징집,강집기록을소각
하여그규모를알수는없으나많은규모의인구가1944년인구총
조사이전에조선을떠남으로써그해총조사에는제외되었다.
네번째,해외로부터귀국할수있는공식적인채널이대부분남한
에만있었기때문에귀국자의상당수가이전북한주민이었다.
다섯번째,1945년10월15일이전중국북부지역,만주,일본,북한
으로부터남한으로인구이동이그당시알려졌던것보다규모가더
컸다는것과이들유입인구의대부분이북한지역주민이었다.
여섯번째,일본의태평양전쟁이막바지에접어들면서총동원을위
한인구자료가필요하였고그결과5년조사주기를무시하고1944년
간이인구총조사가실시되었다.1944년을전후로해서일제의징집․
징용정책이자율적등록에서강제징집으로변화하였고,그해총조
사가의무할당인원을작성하기위해서실시된다고보았기에조선인
들은실제인구를은폐할유인이컸었다.그결과1944년총조사상
인구는실제보다적게조사되었고1946년인구조사와인구격차는
수치상보다는적었을것이다.
마지막으로1946년조사에서이중집계되는인구의수로인해1946
년인구가상당히부풀려지게된원인이될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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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법무통계담당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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