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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김춘추

자(호)
 
인물유형
충신
시대배경
삼국시대

선덕왕 11년 (A.D.642) 7월에 백제 의자왕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국경지방의 40여성을 빼앗고, 8월에는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당항성(黨項城)을 쳤다. 백제는 장군 윤충(允忠)을 시켜 신라의 서쪽 요지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다. 이 때가 신라로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으며 김춘추는 이 어려운 사정을 외교를 통해 해결할려고 결심을 했다.

사면초가의 어려운 사정에 있던 신라로서는 고구려의 이 정변은 참으로 절호의 기회였다.

신라의 장래에 대해 큰 꿈을 갖고 있던 김춘추는 곧 고구려에 가기로 결심했다. 돌아올 길을 기약할 수 없을 만치 어려운 사명을 안고 가는 김춘추는 김유신장군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김춘추는 훈신(訓信)이라는 사람들 데리고 드디어 고구려에 들어갔다. 신라의 귀공자 김춘추를 맞은 고구려에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그를 환영하였다.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대좌……… 이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장면이였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신라가 손 잡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설득시킬려고 애를 썼다.

고구려는 태도를 일변하는 한편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원래는 고구려 영토였다가 신라에 병합된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을 반환하고 진정으로 고구려와 합작할 성의를 보인다면 백제에 대한 공동 전선의 구성에 동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춘추가 바라는 것은 3국의 통일이므로 영토를 할양하는데 동의할 수 없는 까닭에 의연히 거절했다. 이런 태도는 예상대로 김춘추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와 별관에 감금되는 몸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는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대한 방법도 생각해 왔던 터라 유력한 사람을 매수할 작정으로 귀중한 청포 삼백보를 갖고왔다. 김춘추는 고구려 조정의 사정을 잘 살펴둔 까닭에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선도해(先道解)를 매수의 대상으로 삼아서 몰래 선도해를 별관으로 초청하고 서로 술을 나누게 되었다. 술이 취할 때까지 서로의 포부를 털어놓고 한담하는 사이 선도해는 김춘추라는 인물에 감복하여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도해는 취한채 하면서 별주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춘추는 선도해의 뜻을 짐작하여 보장왕께 글을 올리니 왕은 기뻐하며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김춘추는 간신히 범의 입속에서 살아 온 것이다. 비록 고구려와의 화친에는 실패했지만 고구려의 내부를 살피는 다시 없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또 다음 외교책과 신라의 최고 정책을 수립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고구려와의 화친책이 불가능한 것을 안 김춘추의 다음 목적지는 일본이였다.

선덕왕 말년인 A.D.647년에 김춘추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은 백제의 외곽세력으로 오래전부터 백제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김춘추가 일본에 간 것은 일본의 실력을 살피기 위함이다. 백제를 통일 달성을 위한 첫번째 적으로 삼고 있는 신라로서는 그 배후세력의 힘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했고 신라의 전략은 이렇게 치밀했던 것이다.

김춘추는 일년동안이나 일본에 머물면서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하고 귀국했다. 일본에 일년이나 있으면서 그가 얻은 결론은 일본의 힘은 대단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춘추가 일본에서 돌아오니 신라에도 큰 정변이 있었는 뒤였다. 비담이란 자가 주동하는 내란이 있어 김유신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그해 선덕여왕이 세상을 버리고 진덕여왕이 즉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에 이러한 내란이 있었던 뒤라 김춘추는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음을 통감하고 신라의 외교정책에 매듭을 짓고 통일을 위한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 당나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진덕왕2년(A.D.648)에 김춘추는 아들 법민(法敏:문무왕)을 데리고 당으로 들어 갔다. 당나라 황제인 태종은 유향(柳享)이라는 대신을 시켜 김춘추 일행의 신라 사신을 접대했다. 태종은 김춘추의 뛰어난 모습을 보고, 감찬하여 대접이 극진했다.

김춘추는 능숙한 화술로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신라와 당의 동맹이 얼마나 필요하며 이것만이 천하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임을 역설했다. 당나라 태종도 전적으로 김춘추의 이론에 찬동하고 역사적인 나당군사동맹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의 동맹을 성립시킨 김춘추는 귀국길에 올랐다. 아들 문왕(文王)을 당에 남겨두고 떠나올 때 당태종은 3품 이사의 고관들로 하여금 신라사신을 전송하게 했다.

김춘추에 의한 외교의 성공은 사면초가 속에 몰린 신라의 위기를 구하고 통일의 터전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김춘추는 훗날의 태종 무열왕으로서 보다도 대외교가 김춘추로서 영원히 역사에 찬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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