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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이육사

자(호)
육사
인물유형
충신
시대배경
근대이후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육사 선생의 시비에 새겨져 있는 시 '광야'의 한 귀절이다.

선생의 본명은 원록이고 호는 육사이니 조선조 대학자인 퇴계 이 황선생의 후예로 1904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한 선생은 조부 치헌공에게서 한문을 배우다가 다시 보문외숙과 대구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1925년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로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선생은 이로부터 일생을 조국 광복에 몸바친 바 되었으니, 그 해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그리고 이듬해에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니 광복운동의 일선에서 일제와 투쟁하기 위함이었다.

1927년 잠시 귀국했다가 장진홍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형 원기, 동생 원일과 더불어 삼형제가 모두 체포되어 2년 여의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선생의 수인 번호가 64번인데 선생은 여기서 '육사'란 음을 취하여 육사로 호를 삼으니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감옥에 들어감을 오히려 떳떳이 여기고 일생을 오직 조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큰 뜻이 선생의 호 속에 숨어 있다 하겠다.

1929년 대구 감옥을 나온 선생은 북경으로 가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마치고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군정서, 의열단의 활동에 참여하고, 국내에 들어와서는 중외 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기관에도 종사했다.

이렇게 하루도 쉴 날이 없이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그런 바쁜 가운데도 많은 주옥같은 시를 지어 발표했으니, 특히 식민지 아래서의 민족적 비운과 꺼지지 않은 애국의 정열로 조국 광복을 위한 간절한 소망을 담은 시 '광야, 절정' 등의 작품들은 겨레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조국 광복에 몸바친 지 이십 여년, 국내외의 대소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일본 헌병에게 검거 투옥 되기 무릇 17회, 1943년 또 다시 왜경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얼마나 보고 싶던 광복이었던가! 그러나 끝내 광복을 일년 앞둔 1944년 1월 16일 드디어 이국땅 감옥에서 눈을 감으니 선생의 나이 마흔 하나이었다.

1964년 선생을 잊지 못하는 생전의 시우들과 후배들이 선생의 시작품들을 모아 시집 '청포도'를 발간하고 낙동강변에 시비를 세우니 선생의 높은 뜻이 이 땅에 영원히 이어지게 함이리라. 그 후 시비는 안동시 성곡동 안동댐 부근에 있는 민속촌으로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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