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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최제우

자(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인물유형
기타
시대배경
조선시대

조선조 순조(純祖) 24년 10월 28일에 동학의 교주 대신사(大神師) 최제우(崔濟愚)의 호는 수운제(水雲齊), 아명(兒名)은 복술(福述), 족보에 오른 최초의 이름은 제선(濟宣)이였다. 학문과 도덕으로 온 고을에 이름이 높았던 근암(近庵) 최옥(崔 )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세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13세에 울산(蔚山)에서 부인 박씨를 맞아 그런 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며 살 것 같았으나 16세에 부인이 돌아가고 사정이 일변되었다. 세상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친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의 사회 사정은 그의 현실 부정적 사고를 더욱 부채질했다. 세도정치의 폐단이 쌓이고 정치기강은 문란 할대로 문란해졌다. 백성들의 살림은 극도로 어려워져서 원망이 하늘에 사무치는데 흉년이 계속되고 호열자의 유행에 이어서 무서운 여러 병까지 겹치게 되어 농민들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러한 세태를 더욱 어지럽게 만든 것은 사상의 혼란이었다. 즉 서학(西學)이라고도 불리는 천주교의 전래와 그 전파, 그리고 그 교도들에 대한 참혹한 탄압이 그것이다.

최제우는 서양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고자 했다. 그는 서양에 대한 결론을 포덕문(布德文)에 천주교의 포교는 곧 서양세력의 침략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기에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도 새로운 종교를 창시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학은 탄생한 것이다.

최제우는 가족을 다시 찾아서 떠난 지 오래되었던 고향 경주 구미산하의 용담정(龍潭亭)으로 돌아오니 철종(哲宗) 10년(1859)의 일이었다.

이날부터 그는 큰 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는 살아서 세상을 보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다지고 오로지 사색에만 잠기는 나날을 보냈다. 이름도 제선(濟宣)을 제우(濟愚)로 고친 것을 보면 마음에 품은 결심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제우"라는 뜻은 「세상의 미욱한 백성을 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의 종교적인 바탕은 화랑도를 비롯한 우리 나라 고유 사상에 구하고 유(儒), 불(佛), 선(仙)의 교리를 가미시킨 것이다. 천인(天人)의 일체를 추구하고 인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데서 "한울"에 내 스스로를 일치시키려는 수도가 있고 인간의 절대성을 보장하기 위해 평등이 보장되어야 하며 따라서 정치의 혁신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동학은 유교적인 전통사상 일색이었던 당대로서는 틀림없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동학의 교세는 영남과 호남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관에서는 당황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체포령이 내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정세를 알아차리고 제자들은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천명「(天命)」으로 돌리고 태연했다.

철종 14년(A.D.1863) 12월 9일 아침, 그의 수제자인 해월(海月)이 찾아와 스승을 모시고자 하나 최제우는 돌아가라고 거듭 명령하였다. 해월은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배(四拜)를 올리고 물러갔다. 이 날 밤에 대신사(大神師) 최제우는 방안을 청소하고 잡인의 출입을 금한 다음 촛불을 밝히고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과연 한 밤중에 서울에서 나졸 오륙십명이 용담정을 둘러싸고는 선전관 정귀룡이 어명을 전했다. 그는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압송의 행렬이 영천에 이르렀을 때 나졸배가 대신사에게 불경이 심했더니 그를 태운 말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진관이 사과를 하니 그제야 걸음을 옮기더라는 것이다.

또 이 행렬이 한양 30리 밖의 과천(果川)에 이르러 며칠을 쉬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대신사가 문밖으로 나가 북향을 하고 통곡을 했다. 선전관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기다려 보면 곧 알 것이라고만 했다. 이날 저녁에 한양에서 급히 선전관이 내려와서 철종임금님이 승하하셨슴을 전하고는 죄인 최제우를 대구로 돌려서 거기서 죄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전했다. 동학의 교조다운 신통력을 전하는 일화들이다.

대구에서 국문을 당한 최제우 대신사는 끝내 사형을 당했는데 고종이 즉위한 해인, 1864년 3월 10일의 일이며 그의 나이 41세였다. 23일 후에 제자들이 교조의 유해를 모셔다가 구미산하 용담정 근처의 명당자리에 묻었다.

교조(敎祖)가 처형된 지 백년이 되는 해, 순교지인 대구에 그의 대동상이 건립되고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국가 원수를 대리하는 특사도 참석하여 교조 최제우의 위엄을 찬양했다.

신라의 영광이 사라진지 천여년, 최제우라는 한 사람의 탄생으로 이 나라 근대화의 빛은 다시 경주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의 힘으로 새 시대를 여는 계기를 만들어내었으니 이보다 더한 위대한 업적이 또 있겠는가! 경주의 지력이 영원함을 자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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