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 지정 : 보물
- 한자명 : 榮州 浮石寺 幢竿支柱
- 유형분류 :유적_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당간
- 시대 : 통일신라
- 지정일 : 1963-01-21
- 소재지 :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17 부석사 경내
부석사(浮石寺) 경내(境內)로 올라가는 최하(最下) 층계(層階)의 좌측(左側) 노변(路邊)에 위치(位置)하였다. 원위치(原位置)에 원상(原狀)대로 1m의 간격(間隔)을 두고 남지주(南支柱)가 동서(東西)로 상대(相對)해 있다. 상면(相面)하는 내측면(內側面)에는 아무런 조각(彫刻)이 없으며 외면(外面)도 그러한데 양쪽 모서리의 모(角)를 약간(若干) 죽였다. 전(前)ㆍ후(後) 양측면(兩側面)에는 양지주(兩支柱) 공(共)히 주연(周緣)에 폭(幅) 5.4cm의 일조선(一條線)을 양각(陽刻)하였고 상부(上部)에서 이 선대(線帶)와 연결(連結)되어 중앙(中央)에도 5.1cm 폭(幅)의 일조선(一條線)이 종(縱)으로 양각(陽刻)되었다.양지주(兩支柱)의 정부(頂部)는 내면(內面) 상단(上端)에서 외면(外面)으로 내려 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외부(外部)로 깎겨지되 일단(一段)의 굴곡(屈曲)을 두었는데 전(前)ㆍ후면(後面)의 중앙(中央) 종문(縱文)이 이 굴곡부(屈曲部)에서 수하(垂下) 된것이다. 그러므로 전(前)ㆍ후방(後方)에서 보면 상부(上部)는 정부(頂部)에 이단(二段)의 유려(流麗)한 원호(圓弧)가 경사(傾斜)지며 조출(彫出)되고 측면(側面)은 삼조(三條)의 종선문(縱線文)으로 조식(彫飾)되어 있는 것이다. 당간(幢竿)을 고정(固定)시키는 간(杆)은 상부일처(上部一處)에만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장치(裝置)하였던 것인데 내면(內面) 상단(上端)에 장방형(長方形)의 간구(杆溝)를 파서 간(杆)을 끼우도록 되어 있다. 양지주(兩支柱)의 기단부(基壇部)는 현재(現在) 잔존(殘存)치 않고 그 기저부(基底部)에 장석(長石)과 잡석(雜石)으로 구축(構築)한 석탄(石坦)이 있을 뿐인데 지주하부(支柱下部)의 자연석면(自然石面)이 노출(露出)되고 있는 점(點)과 현재(現在)의 구축(構築)된 기대등(基臺等)으로 보아 장방형(長方形)의 기단(基壇)이 시설(施設)되었던 것 같다. 양지주(兩支柱) 사이에는 간주(竿柱)를 받는 원형대석(圓形臺石)이 있어서 곧 간대(竿臺)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간대(竿臺)는 일석(一石)으로 되었으며 방형(方形)의 하대(下臺)위에 원좌(圓座)를 조출(彫出)하였다. 이 원좌(圓座)의 주변(周邊)에는 몰딩고 연화문(蓮花紋)을 조식(彫飾)하였고 상면(上面) 중앙(中央)에 경(徑) 30cm의 원공(圓孔)을 시공(施孔)하여 당간(幢竿)의 저면(底面)을 받고 있다. 대체(大體)로 장식(粧飾)이 적은 지주(支柱)로서 그 고고(高古)한 모양(模樣)이 청초미려(淸楚美麗)하다고 보겠다. 더욱이 세장(細長)하면서도 상(上)ㆍ하부(下部)에 다소(多少)의 두께가 차이(差異)남으로 오히려 안정감(安定感)을 주고 있으며 간결(簡潔)하고 단아(端雅)한 각부(各部)의 조각(彫刻)은 시대(時代)가 올라가는 수법(手法)인 것이다. 이곳 부석사(浮石寺)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초창기(草創期)인 문무왕(文武王) 16년(676 A.D)에 의상조사(義湘祖師)에 의하여 창건(創建)된 바라고 하는데 현재(現在) 경내(境內)에는 당대(當代)로부터 고려시대(高麗時代) 말기(末期)에 까지 걸쳐 조성(造成)된 많은 유물(遺物)이 보존(保存)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도 그 중(中)의 한 유물(遺物)인데 전체적(全體的)인 형태(形態)와 단아(端雅)하고 견실(堅實)한 수법(手法)이 고고(高古)하게 보이므로 그 조성년대(造成年代)도 동사(同寺)의 창건시기(創建時期)와 동일(同一)하게 추정(推定)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학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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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주 부석사 석조문화재 : 정밀실측조사보고서(2020년 발행)
- 단행본 / 저자 : 영주시 우리건축사무소 / 발행처 : 영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