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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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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성

희숙/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안동
출생시기
시대

상세설명

공은 안동인 문경공 진의 후예로 조마면 장암에서 태어났다. 초휘는 응성, 자는 희숙이며 어려서부터 재능이 출중하고 효심이 남달랐다. 특히 큰 일을 하려는 장부의 기가 있어 평소에도 손오병서를 탐독하며,
"대장부로 태어나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지켜 백성을 편안케 못하면 죽어도 이름없는 귀신이 되리라."고 강개해 했다고 한다.

공은 또한 생각이 깊고 의리를 소중히 여겼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1592년(성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우리 집에 형제가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충효는 일체라 하니, 이제 너<아우 응기>는 가문을 보존하도록 하라. 나는 나랏부름에 응하리라!"
하고 가동 30여인을 모으고 재산을 헐어 군비에 보태어 창의에 나섰다.

소모관 여대로 의병장 김면과 더불어 동년 8월에는 지례의 적을 화공하여 퇴치, 공을 세우고 초유사 김성일이 여대로와 공을 독전하여 싸움에는 늘 선봉을 섰다. 동년 11월, 석현에 진치고 있을 때 적은 대거 침입해 들어오고 아군의 군기는 다하여 돌을 모아 적을 대비했지만 중과부적,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다 맞을 순 없다!"
하고 분함을 참지못해 공은 맨손으로 세 차례나 적진에 나아가 적을 퇴치시켰으나 결국 빗발치는 총환에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의벙장으로 향토에선 첫 순절자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년)에 나라에서 공의 충성을 기려 첨정을 추증하였으며 충절안에 기록되었다. 공의 묘소는 상장암에 있는데 의관장이며 여대로는 묘갈에서 '의리에 살아 충절을 이루었으며 떳떳한 이름을 만대에 밝혔다'고 공의 충의를 찬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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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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