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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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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복

향지/소유(수헌)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예천
출생시기
1486년(성조17년)
시대

상세설명

조선 성종 때의 학자를 자는 향지(嚮之), 호는 소유(小游) 혹은 수헌(睡軒)이며 본관은 예천으로 오기(五紀)의 아우이다. 예천군 용문면에서 나고 1486년(성조17년) 식년문과에 급제 예문관·홍문관에 등용되었다가 사가 독서 했으며 문장 필법이 탁월하여 한원에 뽑혀 옥당에 들어갔다.

사관이 되어 사초를 쓸 때 조의제문을 써서 단종을 중국의 의제에 비유하고 세조를 항우에게 비유한 김 종직의 글을 김 일손이 삽입하였고 권 오복이 김종직의 사전을 적어 넣었는데 본래 사이가 나쁘던 이 극돈, 유 자광이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하다가 이 사초를 보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김 일손 등과 같이 극형을 받았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고 예천의 봉산서원에 모시고 유고는 흩어져 거의 없어졌는데 그의 종손 달성 부백이 주워 모아 출판하고 또 무오에 화를 입어 당시의 선비들이 칭도하였으며, 일손과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공이 자작 시고를 김 일손에게 고쳐달라 하고 시 한 수도 지어 같이 보냈다. 그 시에「뱀을 그리면서 발을 붙인 것이 졸(拙)하다 말고, 까뀌를 둘러 콧등에 붙은 흙 깎아 뗄 수 있겠느냐」하였다. 일손은 글로 답하기를「내게 영인의 자귀가 없는데 어찌 향치(香脂:공의 자)의 콧등에 붙은 흙을 깎아 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뒷 이야기로 천계 연간에 어떤 사람이 상을 당하여 묘지를 과천 지방에 정하였더니 그 곁에 고분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공의 무덤이었다. 그 집에서 일을 시작한 지 수일만에 그 자제 한 사람이 역사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역군의 잘못으로 고분 앞에 계절돌 몇 조각을 빼내어 버렸더니 그 날 밤 꿈에 홍포를 입은 장자가 고분으로부터 나와 성낸 듯한 빛을 띄우므로 그 사람이 절하며, "누가냐"고 물었더니 장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권 한림 아무게다" 하고 무덤을 가리키며, "저게 나의 집인데, 근좌에 역군들이와서 내 집을 짓밟고 뜰돌을 빼내어 심히 불안케 하거늘 그대가 어찌 금하지않느냐" 하였다. 그 사람도 역시 선비였으므로, 본래 공의 사적을 잘 알고 있어, 청하여 묻기를, "선생이 항우는 오강을 건너지 않는다. 부를 지으신 분이 아니요"하니, "그렇다"하였다. 그 사람은, "예 그러십니까. 빨리 고쳐 드리겠읍니다"하였다. 이윽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흥건히 온몸을 적시었다. 이튿날 고분앞에 가서 깨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단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 무오명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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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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