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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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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영

국오
활동시기
조선시대
본관
출생시기
1857년 6월 20일
시대

상세설명

조선 고종조 독립운동가로서 호는 국오이며 1857년 6월 20일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도량이 넓고 의리가 강하였으며 한학 및 병서를 읽고 연구하던중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항일 구국운동에 참여하여 의병장 현오우에게 사재 800냥을 희사하였으며 1907년에는 사재를 털어 기성면 사동리에 대흥학교를 설립하여 지방의 젊은이를 모아 개화사상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비보는 2천만 동포에게 통한의 분노를 가져 왔으니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운영해 오던 대흥학교가 배일사상의 온상이라 하여 매화만흥학교와 더불어 폐쇄되는 비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1911년 항일 애국지사들의 의견이 왜인이 손이 덜 미치는 서북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두만강 건너편에 새 나라 건설을 하자는데 모아지자 황만영 선생은 간도 이민정책의 실현에 적극 참여하여 이 고장의 주민 100여 세대를 이주 정착시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그 후 후진 양성의 꿈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1912년 서간도 유하현에서 성제 이시현 선생을 도와 신흥학교 설립을 위한 재정지원에 심혈을 기울려 왔으며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재 시베리아 대한민국회의에 서간도 대표로 참석하여 애국지사 문창범등과 손잡고 항일구국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식민지 통치 10년의 한 맺힌 민족의 절규가 1919년 3월 1일 온 강토에 울려퍼질 때 선생은 만주의 용정땅에서 불철주야 민족정신의 계몽과 전도로 민족 독립운동을 뿌리 내리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1919년 4월 17일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책을 맡아 밀양사람 유필한을 국내에 파견시켜 소기의 임무를 수행케 하였으며 안동사람 이상용이 국무령으로 기용될 때 재정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그 후 교통부 차장에까지 내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내의 파벌적 대립은 선생으로 하여금 울분과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선생은 애통한 마음에 혈서로서 민족적 단결을 호소하는 편지를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발송하였으니 명예와 사사로운 이해를 떠난 선생의 애국충정을 어찌 잊으리오. 귀향 후 1927년 3월 15일 국내의 애국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여 울진 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9년 3월 7일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66세의 나이로 망국의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선생이 가신지 37년이 지난 1976년 12월 12일 지방유지와 일가들이 뜻을 모아 월송정 입구에 추모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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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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